송결칼럼 – 부처님 오신 날

2015.05.25 11:46:30

5월25일은 불기 2559년 ‘부처님 탄생일’이다. 이날 대한불교 조계종, 태고종을 비롯한 각 종단에서는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봉축 법요식을 봉행해 그 뜻을 새기며 기념한다. 이미 지난 주말에는 각 종단의 총무원장과 불교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종로와 광화문 등 전국 일대에서 연등회를 펼쳤다. 

특히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태극기 등’이 행렬 등으로 등장했고 ‘평화통일 한반도 등’과 ‘마애삼존불 등’도 선을 보여 연등회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캬무니'를 중국어로 음역한 것으로, 샤캬는 그가 속했던 부족이름이며, 무니는 '성자'를 의미하므로 석가모니란 '샤캬(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석가의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로, 샤캬 족의 소왕국인 카필라에서 정반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인간의 생애가 생로병사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결국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 많은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부처란 (부다)Buddha, 즉 '깨달은 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탄생하기 전에도 부처와 보살은 무수히 존재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등 불교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부처라 하면 이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석가의 탄생일인 4월 초파일에는 석가탄생을 축하하며, 연등에 자기 가족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록하여 등에 달아 절 밖 또는 법당 안에 걸어놓고 소원을 기원한다. 이날은 절에 열심히 안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절로 몰려들어 석가탄생을 축하한다.



연등(燃燈)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둠과 번뇌를 물리치고 영원한 진리의 광명을 밝힌다는 뜻이었다. 무명으로 가득 찬 어두운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처럼 밝아지고 따뜻한 마음이 불빛처럼 퍼져나가 온 세상이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충만토록 하자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를 보면 대단히 심오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불교를 가깝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새로운 불교문화가 서서히 싹트고 있다. 산속깊이 자리한 산중불교에서 일상생활과 함께하려는 생활불교를 추구하는 젊은 스님들이 늘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또 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의 환상 같은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첨단 소재로 상상 할 수 없는 새로운 발명품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이젠 제4차원 아니 5차원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올 날이 멀지않았다. 또한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까지도 밝혀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생명이 영원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 현실 앞에 종교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도 여기에 걸맞게 개혁되지 않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불교는 전생, 현생, 내생 이라는 윤회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음으로 래(來)생을 극락이라는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참삶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종교의 교리는 모두 똑같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강조하듯 불교에서는 자비를 강조한다. 똑같은 말이다. 나를 사랑하듯 남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그래서 남을 나처럼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먼저지만 나와 남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남이 없는데 나의존재가 무슨 소용인가? 나 혼자 이 세상을 산다면 돈도 벌 필요도 없고 공부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가족도 내가 아니다. 내가 남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란 그렇게 나와 남을 자비로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을 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를 빙자하여 무수한 살상을 일삼는 그런 조직들은 도대체 종교의 교리를 알고 있는 걸까?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 던지 죽게 되어있다.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죽을 목숨을 왜 그렇게 미리 끊으려고 할까? 왜 그렇게 자신들만의 욕심을 부리는 걸까? 인간의 생명은 누구나 똑같이 존귀한 것이다. 

이제 불교는 대승 그 자체의 실천에 임해야 한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인류 공헌에 앞장서야 할 때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불교의 교리처럼, 무수히 살상되어 지는 세계각지의 살상을 멈추게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 북한의 살상 또한 마찬가지다.

더욱 깊숙이 인간세계에 뛰어들어 중생구제의 큰 뜻을 실천해야 한다. 어렵고 힘든 삶에 희망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말로만 중생구제를 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화투데이 기자 001@foodtoda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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