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결칼럼 –이순신의 명량대첩(20)

2014.08.12 08:50:28

대한민국의 영웅 이순신의 ‘명량해전’을 바탕으로 한 영화 ‘명량’이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9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 투자배급사는 ‘명량’이 지난 9일 오전 900만 명을 넘었다고 밝혔다. 


이는 개봉 11일 만에 거둔 흥행 성적으로, ‘괴물’(2006)과 ‘도둑들’(2012)보다 8일이나 빠른 역대 최단 기록이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1)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 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의 딸인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 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이순신은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 ‘봉사’와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 발포수군 ‘만호’ 등을 거쳐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을 지냈으며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됐다. 


선조 22년 이산해의 추천으로 이순신은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과 선전관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 옥포와 합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다음날에도 적진포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7월 8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이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에는 당포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 7월 13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가 됐다.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 11월 11일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했다.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요시라 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해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명량 해전이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선조 31)에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뒀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내며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必生卽死 死必卽生)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순신의 용맹함과 이 말이 없었다면 우리의 수군이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그리고 그 많은 적함을 파괴 시킬 수 있었을까? 


일본의 끈질긴 침략 앞에서 불세출의 장수 이순신이 있었기에 나라의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정치하는 사람들은 각 정파로 나뉘어져 온통 싸움질만하고 나라 안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지금의 야당과 여당의 싸움과 똑 같았다. 충신을 간신으로 몰아 옥중고문 시키고 그러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또 그 사람을 관직에 복직시켜 적을 막으라고 하는 이런 행태의 나라가 무슨 나라란 말인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명량해전의 전투는 현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백병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전투였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과 자연을 이용한 이순신의 지략은 전 세계에서 가장 띄어난 전투였기에 ‘명량’ 이라는 영화에 전 국민이 감동의 물결을 이루는 것 같다. 또한 독도문제 및 위안부문제 같은 국제사회를 어지럽히는 일본의 행태에 온 국민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지금의 정치도 과거 임진왜란 때와 같이 매일 서로 헐뜯는 이런 정치가 계속된다면 우리의 위기는 또 닥칠 것이 뻔하다. 언제 어느 때 우리에게 비수를 꽂을지 모르는 북한, 동북공정으로 역사왜곡을 진행하고 있는 중국,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처럼 우리의 주변이 항상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다.


정부를 위시해 정치권 그리고 국민이 철저한 준비로 힘을 모아 다시는 우리에게 이러한 위기가 닥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문화투데이 기자 etvoc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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