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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웃는 인생사, 노래와 삶-⑤ 트로트냐 뽕짝이냐

국민 힐링, 청량제 역할 톡톡히 하는 트로트 가수들 인기
가무 즐기는 한민족 고유정서 대변하는 한의 노래
너도나도 트로트에 죽고 못 사는 세태 코로나 저리 가라
60년대 트로트 장르로 뽕짝 별칭도 남진 대 나훈아 라이벌

 

 

[뉴시니어 = 구재숙 기자] 우리 한민족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긴다'고 중국 고대사서나 우리 역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동아시아권에서 살아가는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다른 민족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한민족이다.  만주·몽골족 더 거슬러 올라가 우랄알타이어족 계통의 민족성과 통하는 면이 있다.

 

한국인은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무엇이 그렇게 가슴에 엉킨 것이 많았던지 모를 일이지만, 이민족들에 비해서 어질고 착한 성품에 인간미 넘치는 심성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음악 장르 중에서도 트로트가 한국인의 정서에 너무나 잘 맞는 장르가 아닌 가 한다.

 

‘울고 웃는 인생사, 노래와 삶’ 시리즈 5탄의 말문을 열어가 보자. 전회에서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를 소개한 바 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가요계는 트로트라는 뽕짝 시대가 열렸는데, 1960년대 중반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트로트와 뽕짝이라는 말이 혼용 되었고, 이 가운데 뽕짝을 왜색(일본)풍이라 하여 다소 낮게 보는 풍조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뽕짝이냐 트로트냐 하면서 섞어서 사용하다가 점차 트로트라는 말로 대체됐다. 하지만 뽕짝이란 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LP판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트로트는 한층 더 발전되어 갔고, 이미자는 트로트의 중심에서 서게 됐다.

 

이어서 최희준, 김상희 등 고학력 가수들이 등장 하고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데뷔한 현미의 《밤안개》가 인기를 끌었다. 한명숙이 발표한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프랑스의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나 일본의 하마무라 미치코 등이 리메이크 하면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권까지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동숙의 노래》로 문주란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남진, 나훈아의 등장은 한국가요사상 핵 폭풍을 일으켰다. 1967년 남진이 부른 《가슴 아프게》가 크게 히트 했고, 같은 해에는 라이벌로 등장한 나훈아가 데뷔하기도 했다. 자매 가수들도 활동을 했는데 《워싱턴 광장》, 《울릉도 트위스트》등을 부른 정 씨스터즈를 비롯해 《남성 금지구역》,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등을 부른 이 씨스터즈, 《마포종점》, 《삼천포 아가씨》등을 부른 은방울 자매가 두각을 나타냈다.

 

1970년대에는 신인 가수였던 남진, 나훈아가 라이벌 2인 체제를 이루면서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 잡았다. 이 시기에는 통기타 가수, 포크송 가수 등 여러 장르의 가수들이 대거 등장 하였지만 트로트 가수였던 남진, 나훈아의 인기가 더 많았기 때문에 트로트가 주류로서 가요계를 장악했다. 남진은 팝 스타일과 빠른 템포의 트로트를 선 보였으며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를 주로 노래하였다. 이 때 부터 트로트는 정통과 정통에서 벗어 나 다양한 음악적 요소로 세분화 되어 가고 있었다. 문주란은 〈공항의 이별〉, 〈공항의 부는 바람〉, 〈공항 대합실〉등 공항 시리즈가 인기를 얻었다.

 

평소 배우 지망생이던 남진은 약 2년을 H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팝 가수로 데뷔하였고, 데뷔 당시 여러 팝 장르의 노래들을 불렀지만 히트를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즐겨서 불렀던 그의 트로트 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히트하자 일찌감치 트로트로 전향하였으며 1967년 히트곡 메이커였던 작곡가 박춘석의 〈가슴 아프게〉를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남진은 가수였지만 1967년 박상호 감독의 영화 《가슴 아프게》에 주연으로 처음 출연하면서 부터 영화배우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 해 장일호 감독의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국도극장에서 처음 개봉하여 당시로서는 엄청난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시킨 흥행작으로 지방에서도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렸다.

 

데뷔와 동시에 인기를 얻었던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었고, 미궁에서도 한동안 생활하다가 귀국, 지금은 레전드 가수로 왕성한 활동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가슴 아프게>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아득히 바다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목메어 운다

 

 

<울려고 내가 왔나>

 

울려고 내가 왔나 누굴 찾아 여기 왔나

낯설은 타향땅에 내가 왜 왔나

하늘마저 날 울려 궂은비는 내리고

무정할사 옛사람아 그대 찾아 천리길을

울려고 네게 갔나

 

그누구 찾아왔나 영산강아 말을 해 다오

반겨줄 그 사람은 마음이 변해

아쉬웠던 내 사랑 찬서리에 시드나

그렇지만 믿고싶어 보고프면 또 오리라

울면서 찾아오리

 

나훈아는 1965년에 형을 따라 서울로 상경, 서라벌고등학교에 입학, 고교 1학년 때 오아시스레코드와 계약하여 〈천리 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자신만의 독특한 간드러진 꺾기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나훈아는 1968년에 발표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크게 히트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루었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의 가요계를 장악하면서 서로 경쟁을 벌여 보통 남진 아니면 나훈아가 가수왕 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실제 방송사 기록을 보면 남진이 주로 1위와 동시에 가수왕상을 수상하였으며 나훈아는 주로 2위를 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나훈아는 남진과 함께 경쟁하면서 그 시기에 침체된 대중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어 대중가요의 활성화를 이끌었다. 1970년대는 나훈아가 주요 히트곡을 동시에 발표하면서 남진이 발표하는 노래와 동시에 인기를 얻게 되자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합이 펼쳐졌다. 지금은 거의 팬들 앞에 서지 않고 있어서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먼 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서로가 헤어지면 모두가 괴로워서 울테니까요

 

이별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대답할테요

먼 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서로가 헤어지면 모두가 괴로워서 울테니까요

울테니까요

 

 

<님 그리워>

 

물어물어 찾아왔소 그님이 계시는곳

차거운 밤바람은 몰아치는데 그님은 보이지 않네

저달 보고 물어본다 님계신 곳을

울며불며 찾아봐도 그님은 간곳이 없네

 

물어물어 찾아왔소 그님이 계시는곳

차거운 밤바람도 멀어지는데 그님은 오시지 않네

저별 보고 물어본다 님계신 곳을

울며불며 찾아봐도 그님은 간곳이 없네

 

트로트가 다시 팬들의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은 TV조선의 ‘미스트롯’ 경연에서부터다. ‘송가인’이라는 특출한 트로트 가수가 배출되었는데, 그녀의 국악이 큰 저력이 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우리 고유의 음악인 민요 판소리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초기 트로트 가수들의 노래가 하나로 융합된 독특한 음색과 창법이 팬들의 가슴을 울린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여세를 몰아서 ‘미스터 트롯’ 또한 자연스럽게 떠버렸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온 국민이 우울한 나날을 보낼 때, 트로트는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에 위안을 주고 한을 카타르시스(정화)시켜 주면서 미래지향적인 꿈과 희망을 주는 노래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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