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승려대회가 열리게 된 직접적인 발단은 정청래 의원의 ‘봉이 김선달’ 발언이었지만, 승려대회까지 개최하게 된 배경에는 정부의 종교편향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불교는 한민족의 종교로서 문화재의 70%가 불교문화재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짧은 천주교나 개신교인 기독교의 교세가 불교를 앞지르면서 종교편향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 불교계의 시각이다. 해법은 차별금지법 제정·종교편향 제도적 정비인데, 정부와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이번 승려대회를 계기로 불교계의 주장을 심각하게 수용해서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승려대회란 승단 내부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열리는 절 집안의 대중공의(大衆公議) 제도이지만 이번에는 불교의 호교호법(護敎護法) 차원의 대회였고, 향후 불교계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이미 예고한대로 ‘불교도대회’로 이어질 것임은 명약관화하다고 내다본다.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가 1월 21일 오후 2시 5천여 승려가 조계사 경내에 운집하여 ‘정부의 종교편향정책이 심각하다’고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했다. 불교계가 제기하는 ‘불교왜곡.종교편향’은 지난해 국정 감사에서 정청래 의원이 사찰의 문화재관람료를 ‘통행세’로
선거철만 되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무속인 논란이다. 이번에 등장하는 모(某) 법사가 무속인 인지 아니면 불교를 전법 포교하는 법사(法師) 신분인지는 좀 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사단법인 대한불교종정협의회에 따르면 불교를 포교하는 법사라고 한다. 이 분이 ‘국민의 힘’ 정당에서 대선과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언론이 지나치게 과대포장 내지는 희화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이런 차제에 무속신앙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무속신앙의 역사는 인류 시원과 더불어 시작된다. 간단히 무속(巫俗)이라고 하지만, 본래는 무교(巫敎) 또는 무속신앙(巫俗信仰)으로서 일종의 토착 종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 불교나 기독교도 한국 땅에 와서는 약간의 무속적인 영향을 받아서 정착하는 과정을 밟은 것이 한국 종교사의 한 단면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샤먼’이라는 말은 퉁구스계족에서 주술사를 의미하는 사만(Saman)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도 인도 산스크리트어 사문(沙門)을 의미하는 쉬라마나(Sramana)나 빨리어의 사마나(samana)로부터의 차용어라든지, 페르시아어의 우상을 뜻하는 셰멘(shemen), 한자에서 사당을 의미하는 사(祠)로부
요즘 세상은 자기 홍보 시대라고 해서 자신의 장점이나 주장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을 별로 흉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적극적인 성향도 결코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빈축을 사게 되고 실망까지 안겨줄 수도 있다. 예로부터 동양의 한자문화권이나 한국사회의 국민정서가 나를 알아주라고 강요하는 것 보다는 내가 남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는 이런 동양전래의 겸양정신이 무색할 정도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거나 걱정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 사람의 인격과 교양 수준일 수도 있겠으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만을 알아주라는 것은 어딘지 좀 이상하고 이기주의적인 면이 없지 않다. 세상을 살면서 내 주변에 존경할만한 인격과 수양을 갖춘 분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항상 이런 분들과 만나면서 차 한 잔의 담소를 나눈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보람된 인간관계가 아니랴!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매정하고 냉혹해서 누구하고 말 붙여 볼 수 없도록 인정이 메말라 가고 있어서 슬프다 못해서 고통스럽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선거철
세계적인 추세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분명 고령화 시대에 진입했다고 하겠다. 내가 노인이 되어가서 그런지 몰라도 주위에는 나이든 사람이 많아 보인다. 출산율 저하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노인 인구가 많아지는 것은 현실인 것 같다. 젊은 층에서 결혼 적령기가 되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둬야 하는데, 결혼관 자녀관 인생관이 바뀌다보니 결과적으로 노인 인구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대안은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져야 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젊은이들이 직장을 다니고 뚜렷한 직업을 가져야 마음 놓고 결혼해서 자녀양육도 하고 행복한 가정을 설계하는데, 직업도 없고 월급으로는 도저히 집을 마련할 형편이 안 되니 결국 혼자 살아가게 되든가 부모 슬하에서 독립을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특출한 정책과 대안을 제시해서 현안을 타개해야 하는데 이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이든 사람들에게 건강하게 잘 사는 법을 강조한다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지만, 노인들로서는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게 잘사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들마저 풀이
참으로 불편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코로나에 떨고 지금은 오미크론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인류는 한동안 의약 기술의 진보로 몸 건강에 대해서는 큰 걱정 없이 살아왔다. 물론 지구촌 곳곳에서는 질병 때문에 고통 받고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서 멀쩡한 사람들이 고귀한 생명을 잃는 것이 예사였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지난 2년여 동안 인류는 전례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곤욕을 치루고 있다. 백신이 나와서 바이러스를 잡는다고 해도, 변이(變異)가 생겨서 아무리 백신이 새로 발견되어도 소용없는 꼴이 되고 있다. 하지만 끝내는 어떤 바이러스 변이라도 잡는 백신은 나오고야 말 것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인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더 받을 수밖에 없다.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 방역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세태(世態)와 인심(人心)을 역학(易學) 적으로 풀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흔히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연말연시(年末年始)에는 지나간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다가올 새해를 어떤 희망과 기쁨으로 맞고 싶은 충동이 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올해는 이제 며칠 남아 있지 않은데, 이것은 어
오늘(12월 22일)은 동지 날이다. 12월22일은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이다. 작은설(亞歲)이라고도 불리는 이날, 옛날 사람들은 찹쌀가루로 만든 새알심을 넣어 쑨 팥죽을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고, 이웃과 팥죽을 나눠먹었다. 액운을 없애는 의미를 담아 대문에 팥죽을 발랐다. 또한 관리들은 동짓날 임금을 찾아가 하례를 올렸다고 한다. 동지는 음(陰)의 기운이 강한 날이지만, 다음날은 다시 양의 기운이 세지는 날이다. 그래서 동지는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시기로 여겨져 왔다. 우리의 옛 것을 무조건 헌 것이라 하여 무시해 버리는 우리의 무식을 탓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다 무식하고 무지하고 미신적이어서 이런 역법을 채택했고, 세시풍속을 하나의 생활의례로서 일상화 했다는 말인가. 세시풍속은 당시 농경문화에서의 최대 페스티벌이었다. 특히 동지는 작은 설 명절이라고도 하였다. 각설하고 동지 페스티벌은 불교에서 수용해서 절에서 주로 동지문화를 계승해 오고 있다. 역사성을 따질 필요도 없이 절에서 찹쌀가루로 새알심을 만들어서 쑨 팥죽을 이웃과 먹으며 새해맞이를 하고 대문에 발라 액운 없애기도 한다. 이런 세시풍속 의례를 미신이라고 배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문화인의 삶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전부 물질만능, 황금만능, 금권주의에 의해서 세상이 돌아가다 보니 자기는 문화인이며 문화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는 것 같다. 문화는 우리 사회의 한 행동양식이다. 어떤 세계관, 사회사상, 가치관을 갖느냐에 따라서 행동양식도 달라진다. 행동양식의 차이에 따라서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문화가 일반적으로 인간이 주어진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본능을 적절히 조절하여 만들어낸 생활양식과 그에 따른 산물들을 모두 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문화에 대한 일반론적인 정의가 되겠다. 우리가 문화란 일반 정의 앞에 제한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종교문화인 불교문화, 기독교 문화, 한국문화, 미국문화와 같은 복합명사를 사용할 수도 있다. 문화인이란 말도 결국에는 어떤 문화적인 배경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문화인의 정의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렵고도 다양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는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와 같은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
늙으나 젊으나 행복하게 살고자하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사는 형편이 다르다보니 천태만상 천태만별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마주침이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는 불로장수를 바라서 서복(서시)이라는 신하 방사(方士)를 시켜서 늙지 않는 불로초(不老草)를 구해 오도록 했다. 많은 인원과 경비를 주었으나 서복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세계를 정복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권력을 누렸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그는 서정(西征)길에 있는 전장에서 칼을 차고 무수한 목숨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는 폭군이었지만, 마음 한 쪽에서는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꼈다. 칭기즈칸이 듣자하니 불교의 고승 해운 선사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만나 봤으나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다. 세계를 정복하면서 영토가 넓어지는 것과 비례하여 마음속에서는 허무한 생각이 더 커져만 갔다. 그는 누군가 정신적 지도자를 만나서 뭔가 신출한 메시지를 들어야만 했다. 수소문하니 당시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의 수장 도사 장춘자(長春子)라는 신선이 있음을 듣고 당장 만남을 명했다. 장춘자는 본명이 구처기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이동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로나 19 임에도 많은 국민이 고향을 찾아갈 것이다. 민족의 대이동으로도 표현되는 명절 풍속도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포근한 사랑을 안겨준다. 나이든 분들은 대부분이 어린 시절을 시골 고향에서 보냈기 때문에 고향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지난 반세기를 더듬어본다면 대도시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국민도 상당수이겠으나, 그래도 시골 출신 국민이 많을 것이다. 비단 시골이 아니더라도 지방도시나 시군 읍면 할 것 없이 지방 출신들은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사정이 있어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 고향이 아닐까. 이것저것 선물 보따리를 들고 찾아가던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나훈아의 ‘고향역’은 그래서 더 정겹게 느껴진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쁜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 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이런 노래 가사 속에서 우리는 우
한가위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다. 고향에 계시는 노부모들은 언제나 자식들이 오나 하고 기다려지게 된다. 금지옥엽 같은 자식들을 밖으로 내보내 놓고 걱정만 하던 부모들은 자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고향 집을 찾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왁자지껄 들이닥쳐도 즐겁기만 한 것이 부모 심정이다. 누구나 어릴 때의 추석명절은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추석 명절이라고 해봐야 공휴일 이상의 개념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70년대 이전 까지는 누구나 고향을 찾아가서 정답고 그리운 부모형제들을 만나서 오순도순 피붙이의 정을 나누는 것이 추석명절의 우리네 풍습이었다. 추석을 한가위라고도 한다. 우리 민족의 명절 가운데 설날과 더불어 최고의 명절로 여겨왔다. 추석은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였던 시기에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연중 최대 명절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데, 추석의 다른 이름만으로도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 한가위, 팔 월 대보름 등이 있다. 가을 추수를 끝내기 전에 덜 익은 쌀로 만든 별미 송편과 햇과일을 진설하고 조상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차례를 지내는데, 옛날 같으면 일가친척이 고향에 모여 함께 차례를 지